부록 1: 거짓 부흥의 특징

거짓 예배, 거짓 부흥의 특징


미국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 있는 기독교 교회내의 공통적인 고민이 있는데 그것은 매년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 있는 많은 기독교회들에서 청년들이 신앙에 흥미를 잃고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들과 목사들은 축제식 예배 형식을 교회 안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축제식 예배 형식은 원래 천주교회에서 시작하였는데, 오순절파(순복음) 교회들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고, 지금은 거의 모든 기독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배 형식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떠나간 교인들에게 영적인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신앙부흥을 일으키려는 노력 대신에, 교인들이 떠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흥미 위주로, 또한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축제식 예배 형식을 교회에 받아들였다.

교회 안의 두 부류

축제식 예배 형식에 대해서 좀더 깊이 있게 언급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복음을 전파해야 할까? 아니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할까?” 우리는 신실한 교인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재, 교회 안에는 이 질문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한 부류는 복음과 진리에 초점을 맞춰서 그것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면에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올바로 세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교육시키는 일에 강조점을 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한 부류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교회를 빨리 성장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일하고 있다. 교회의 성장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론에 대하여 골몰하게 되는데, 그들은 교인 수가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한 나머지 진리와 원칙에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 수를 늘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교회에 축제 예배 형식을 도입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눈을 감고 손을 흔들며 복음 성가를 부름으로써, 감정적으로 흥분된 상태 하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가 바로 축제식 예배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 방식은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는 성령의 음성을 소홀히 여기게 이끌어 간다. 왜냐하면 일단 감정적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러한 교회들은 더 이상 교인들의 죄의 문제와 회개에 대한 촉구를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인들의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깨뜨리는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지만, 사단은 인간의 감정을 통하여 접근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개, 감정적 예배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가?”, 또는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맛볼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지금은 축제의 기분에 들뜰 때가 아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전에서 손을 들고 몸을 흔들면서 복음 성가를 부를 때가 아니다. 지금은 드럼과 현란한 조명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해서는 안 될 때이다. 지금은 예수께서 다시 재림하실 날이 점점 가까워지는 때로서, 재림을 위해 준비하며 자신의 죄와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살아야 할 때이다. 거룩한 천사들마저 하나님 앞에서는 날개로 얼굴과 몸을 가리며 깊은 경외심을 나타내는데, 어찌 우리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경박한 음악과 몸짓과 손동작을 할 수 있을까? 축제식 예배를 받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해 보고 경건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오순절파식 예배와 방언

오순절 주의(Pentecostalism)의 흔들어 대는 손과 몸, 극히 감정적인 설교들, 크고 쿵작거리는 음악, 실신하여 쓰러짐, 방언을 말함, 기적적인 치료들을 우리들은 주위에서 많이 보아 왔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까? 방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본(A. D. Bohn) 목사님은 자신이 시카고에서 어떤 날 저녁 한 오순절 교회의 장막 집회에 참석해서 한 부인이 중국어로 방언을 하는 것을 들었고, 자신이 아는 한 중국인 세탁업자가 청중 가운데 있는 것을 보았다. 후에 본 목사님이 자신의 세탁물을 찾으러 그 중국인 세탁업자가 하는 세탁소에 가서 말했다. “당신이 전에 그 장막 집회에서 중국 방언을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하고 묻자, 그 중국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 얼굴을 찡그리며, “재미없어요.”라고 했다. “왜요? 그 부인이 당신네 나라말로 방언한다고 하던데요.” 그 중국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중국말로 하는 것은 맞았는데, 얼마나 욕지거리를 하는지.”

하와이 섬 북부 연안에 살고 있던 한 젊은 포르투갈 여인이 자기네 교회에서 드리는 의식들에 싫증이 나서 오순절 교회 집회에 참석했다가 그 교회 교인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그녀는 방언까지 말하게 되었다. 열렬한 선교정신으로 그녀는 한 필리핀 사람들의 야영회에 참석하여 포르투갈 말이 섞인 엉터리 영어로 필리핀 사람들에게 증거하려 했으나 언어 소통이 어려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좌절한 그녀는 잠시 멈춰서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고, 기적적으로 그녀는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 당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든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든지, 그녀를 흘겨보든지 하였다. 놀란 그녀는 방언을 멈추고 엉터리 영어로 물었다.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왜 여러분들은 나 말 하는 것 싫어합니까? 나, 일로카노(Ilocano) 말 하는 겁니다. 아닙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일로카노 말은 잘 하는데, 당신이 하는 말은 순전히 입에 담지 못할 소리들이란 말이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일로카노 말로 음담패설을 토해냈다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성경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결국은 방언에 대한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성경을 함께 공부한 목사님에게 그녀가 방언을 말한 후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었었던 것을 종종 두려워했다고 덧붙였다.

사단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남은 무리가 준비되고 늦은 비 성령의 운동(요한계시록 18장에 나타난 예언)과 큰 부흥이 가까이 이른 것을 알고, 미리 오순절 식의 굉장한 거짓 부흥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자기의 거짓 부흥이 먼저 있도록 고안한다. 그는 이 마지막 큰 성령의 운동(큰 성령의 운동과 외침으로 각 종파와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함께 모여 마지막 남은 무리를 이루게 됨)을 방해하려고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꾸며 냄으로써 이를 막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속이는 권력 아래 모이는 교회들 가운데는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내린 것처럼, 소위 큰 부흥이 일어난 듯이 일반에게 생각되도록 하는 일들이 나타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볼 때에 그 실상은 전연 다른 신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여 놀랄만한 일을 행하신다고 기뻐 날뛸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사단의 기만적인 권력 아래 모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유의하라. 거기에는 마치 큰 종교적 부흥이 있는 것처럼 나타내질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볼 때에 그 실상은 전연 다른 영, 즉 사단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해서 놀랄만한 일을 행하신다는 생각으로 미혹될 것이다.

거짓 부흥과 참 부흥이 우리가 곧 통과해야만 할 두 가지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가 첫 번째 것인 거짓 부흥과 그 다음 것인 참 부흥을 구분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공부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거짓 부흥과 진짜 부흥에 대해 연구해 보자.

진짜 부흥

모든 진짜 부흥들에서 남녀들은 죄를 깊이 자각하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낌으로 자백과 회개로 용서를 발견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 그들은 믿고 침례를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애를 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그들은 전에 행하던 그들의 정욕을 따라 자기 자신들을 꼴 짓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주님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그들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그리하여 전에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고, 전에 사랑하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게 된다. 교만하고 자기주장만 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며, 허영적이고 교만한 사람들이 착실하고 조심성 있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의 결과이다. 개혁이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거짓 부흥

거짓 부흥들의 성격을 살펴보자.

1. 상상력에 호소
2. 감정을 자극
3. “무언가 새롭고 깜짝 놀랄만한 것에 대한 사랑”을 불러 일으킴
4. 성경 진리에 과히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음
5.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 색채를 원함
6. 조용한 이성에 호소하는 기별 같은 것엔 아무 반응이 없음
7. 진짜를 거짓과 혼합함 - 많은 사람들이 그 실상은 전연 다른 신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기뻐함
8.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릇된 태도
9. 마음과 생애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음
10. 그리스도로 더불어 연합함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참가하게 됨  



거짓부흥의 특징들

1. 큰 소리로 외치는 것, 드럼과 요란한 음악과 춤이 따름
2. 악기들의 남용과 오용
3. 혼잡한 소리와 광적인 태도
4. 이지적인 인간의 감각들은 혼란을 일으켜 올바른 결정들을 할 수 없게 됨

올바르게 사용되었더라면 축복이 될 음악이 잘못 사용될 때는 사단의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시끄러운 음악과 요란한 리듬들이 축제 교회 예배 형식을 타고 교회에 자리 잡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일 축제 예배가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던 자들을 교회에 오도록 한다면 좋은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난잡한 음악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하실 지도 모르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만을 받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진정한 신앙의 부흥이란, 마치 옛적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견책의 기별을 받았을 때 즉시 마음을 겸비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처럼, 열광적인 기쁨은 별로 없을지 모르나 오히려 마음을 깊이 살피고, 죄를 고백하고, 세상을 버리며,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히 소원하며 끈기 있는 기도와 확고한 헌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

오순절파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무리들, 심지어는 “대중”을 끄는 데 있어서 굉장히 성공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표면적으로 부흥을 판단할 수는 없다. 축제식 예배 형태를 도입한 교회들에 몰려드는 대중들을 보면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인데, 거기에는 피상적인 회심이 넘칠 것이며,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하고 산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피상적인 많은 신자들로 교회가 가득 차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축제 예배” 라 불리는 오순절 교회의 예배 형식을 보면, 그 예배는 크고 꿍꽝거리는 음악으로 이루어지며, 또 손과 몸을 흔들고 성경은 아주 조금만 가르치는 형식의 예배이다. 또한 기도로 병을 고치는 치유의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하고(나중에 가서 보면 다시 증상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음), 진정으로 회개하여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새로운 생애와 성품으로 변화하는 참된 개심의 경험이 전혀 수반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죄된 생활에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 스스로를 위해 예배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니라 그들의 귀를 아니 오감을 즐겁게 하기 위한 한 “축제”에 불과할 뿐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조용하며 깊다. 그곳에서는 진정한 개심의 변화가 수반된다. 자신의 마음대로 또는 기호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볼” 것이다(엡 5:10). 그리고 그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를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등을 그들의 삶 속에서 맺을 것이다.

온 우주에 셀 수 없이 수많은 별들(행성들)을 창조하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주 정확하게 움직이시는 질서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무질서하고 방정맞게 소리지르는 인간의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위의 자연계를 볼 때에도 상식적으로도 “축제식 예배”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교도 제사장들과 홀로 하나님 편에 서서 싸운 엘리야의 경험을 통해 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우리의 제사는 시끄럽게 정신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또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간구할 때 받으실 만한 것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엄숙하고, 신성하며, 지성적이어야 한다. 어떠한 세상적이나 표면적인 예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최후의 선과 악의 싸움에 있어서 참된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마지막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에 의해 모양뿐인 신앙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진행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안전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찾고 말씀대로 행할 때에만 위험이 없다.

지금 많은 교회들에서 축제식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그 예배 형식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고 있다. 교회들은 단지 교인 숫자의 “성장”만을 추구하여 축제예배 형식을 따르고, 칭송하고, 확장시키며, 오순절주의로 쏠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에 우리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 축제예배 형식은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일어날 진짜 부흥이 있기 전에 나타날 사단의 거대한 거짓 부흥의 시작일지 모른다. 함께 휩쓸려 껑충껑충 뛰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