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성경적인 침례 방법

어떻게 침례를 받아야 할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침례의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까?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바울은 에베소서 4:5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비록 세상에는 여러 가지 믿음과 침례에 대한 모조품들이 존재하지만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진품과 모조품을 구별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침례를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은 그 침례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를 결정한다. 아름다운 의식이 무엇이고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바울이 설명하는 것을 읽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4-6).

바울이 이 성경절을 통하여 한 말씀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죗된 생활의 종결을 바울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설명한다. 죽은 옛 사람의 몸을 장사지내는 것을 바울은 침례(세례)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 속에 잠김으로 침례를 받는 과정은 옛 사람을 장사시키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을 상징한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과 화합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새로 개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의미 깊은 경험인가? 그들은 침례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를 외부적으로 증거 함으로서 앞으로 순종과 승리의 삶을 살 것을 사람들 앞에서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자. 이러한 의미를 상징할 수 있는 오직 한 방법은 바로 물 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침례의 방법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침례의 방법이며,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침례였을까?

예수께서는 비록 그 모태에서부터 성령 충만하였으나, 요한에게 침례 주기를 요구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마태복음 3:15). 이제 요단강에서 어떻게 침례가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자.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마가복음 1:9,10)

예수께서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요단 강변에서 침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요단강 물 속에서 침례를 받으셨다. 마가는 "물 속에서 올라 오실새"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완전히 물 속에 잠기셨다가 나오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모본을 따랐는가? 사도행전 8장에 빌립이 사막에서 에티오피아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준 일을 기록하고 있다. 한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여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였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티오피아 사람 곧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사도행전 8:26-28). 이 사람은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빌립에게 설명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빌립은 우리의 죄를 지시기 위하여 오신 속죄양,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고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명하여 벙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가신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사도행전 8:36-39).

누가는 "둘 다 물에 내려가"라고 그 방법을 자세히 적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회가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 서신들과 초기 기독교사에 나타난 사도들의 행적을 통하여 이러한 침례의 방식이 없어지고 새로운 방법을 세웠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요한이 건조한 지역에서 그의 활동을 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3:22에는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죄를 장사지내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화합을 상징하는 침례는 오직 한 방법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요한은, 지금 많은 교회들이 행하는 것처럼, 물 한 통을 받아서 그 물을 뿌리던지 붇는 형식으로 침례를 주지 않았다. 그는 요단강 주변의 도시들에 머물며 그 충분한 물을 이용하여 물에 잠기는 침례를 주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 그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았다.

예수께서 침례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그는 헬라어인 "Batizo"를 사용하셨다. 학자들은 2000년 동안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어졌는지 그 역사를 연구하였다. 학자들은 이 말이 그 동안 한번도 "장사지내다" 또는 "완전히 묻히다"라는 어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연구 결과를 요약한 Conant 박사는 "baptizo"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이 말은 그 어원이 가리키는 의미에서 한번도 바뀌었던 적이 없었다. 헬라 문학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2000년 동안 이 말이 다른 뜻으로 쓰인 예는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이 단어는 물에 완전히 잠김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부분적으로 물을 뿌림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인 예는 하나도 없었다."

예수께서 침례라고 말씀하실 때에 "Baptizo"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헬라어에는 물을 뿌린다는 의미의 단어들도 있지만 예수께서 한번도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죽음, 장사, 부활을 표현하는 한 말만 사용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