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 성화되는 비결

성화되는 비결?


성화는 어떻게 얻는가? 성화는 오직 믿음으로 부여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생애를 당신께 바친 사람들에게 주시는 거룩한 선물이다.

성화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물, 즉 하늘에서 오는 은혜와 능력을 붙잡음으로 생애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의 생애에는 행함이 필수불가결한 증거로 나타나게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14-24)고 말한다. 다음의 성경절을 또 보자.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3).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에 걸맞는 행함이 뒤를 따라야 할 것이다.

위험한 믿음?

하늘 아버지의 뜻(진리인 성경 말씀)과 그것에 대한 순종(행함) 없이, “믿으라, 믿으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외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가르침이다. 믿음에 대한 오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속에는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균형지게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우리는 마귀도 가지고 있는, 머리로 알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약 2:19,20 참조) 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 행함이 수반되는 참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가르침 속에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굴복과 변화없이 이기적인 생활 속에서 편히 안주하게 만드는 위험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동의하기만 하면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믿음을 설명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절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선생들아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0,31).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절을 말하면서 “믿으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또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지만, 그분의 말씀을 순종(행함)치 않을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이 오해할 수 없게 설명되어 있다. 우리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심판은 행함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입술로만 믿는 진리?

우리는 입술로만 진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면, 옛날과 똑같이 질투하고, 옛날과 똑같이 화내고, 옛날과 똑같이 세상을 사랑하고, 옛날과 똑같이 복수하고 싶어하고, 옛날과 똑같이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진리와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이 생활과 성품을 온전히 예수님과 같이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어쩌면 여러분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그대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라” 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예수께서는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되물으셨다. 그때 예수께 질문했던 사람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라고 하셨다(눅 10: 25~28). 믿음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마음과 정신의 법칙이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져온다. 참된 믿음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동의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순종하게 한다. 행함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경건한 행실과 순종을 열매로 맺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함수 관계이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14).


성화는 은혜로 얻는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믿는 것도 잘 알고 그리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야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생활이 변화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갈등하고 있다. 그리고 변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갈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좋은 치료방법이 있다. 그 치료방법은 곧 “은혜”이다. 이 대답을 듣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은혜”의 참된 의미와 힘을 알게 된다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함께 공부해 보자.


“은혜”는 능력?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은혜”라는 단어는 “힘”, “파워(power)” 라는 뜻으로 쓰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성경절을 살펴보자.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사망에 이르도록) 왕 노릇한(다스린)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다스린)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롬 5: 20,21).

이 성경절을 보면 죄도 다스리는 권세(능력, 힘)을 가졌고, 은혜도 다스리는 권세(능력, 힘)을 가진 것을 알게된다. 그러므로 위의 성경절은 은혜도 다스리는 힘을 가졌고, 죄도 다스리는 힘을 가졌는데,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는 때에는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이 그른 것을 행하기 보다 더욱 쉽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죄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모든 능력을 격퇴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반항의 정신을 가지고 굴복하지 않는 것; 예를 들어 다소의 사울이 가시채를 뒷발질(양심의 찌름을 항거하여 발길질)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행 26:14 참조].

그러나 죄인이 회개하여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면, 마음에서 죄의 권세가 깨어지고 은혜가 주권을 잡게 되어, 은혜가 죄를 다스리며 죄의 권세(능력)을 격퇴하게 된다. 죄가 다스리는 때에, 올바로 행하기보다 그릇 행하기가 쉬운 것과 같이, 은혜가 다스리는 때에는 그릇 행하기 보다 바로 행하기 쉽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의 영적인 생애에 적용해 보자.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구원을 받아 새 마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그의 생애에 늘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악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준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은혜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면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좌정하실 것이고, 그러면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어떻게 거짓말 하실 수 없고 불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를 그대로 사랑하고 있고 버리지 않는 사람을 그냥 의롭다고 칭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뿐 아니라 진짜 의롭게 해주신다. (물론 회개하도록 이끄시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처음으로 거듭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면 많은 깨달음과 연약함으로 인해 생기는 실수들을 거치게 되지만... )


은혜의 의미 2가지

그러므로 은혜는 두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자격없는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용서와 구원으로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고,
2. 우리가 죄로 죽었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개심시키시고 죄의 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성령의 역사(엡 2:1~5 참조)를 말한다.


복음의 능력?

성경에는 “은혜”와 같은 뜻의 의미가 담겨 있는 단어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복음”이라는 단어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16).
“복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두나미스”인데, 그 뜻은 영어로 “다이나마이트”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 로마서에서 “복음”을 능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이 도데체 무슨 뜻일까?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능력이다. 복음은 능력을 가졌으므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음의 능력도 받아들이게 되어, 그 능력으로 죄를 다스리고 이기는 생애를 살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신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능력이다.

복음의 능력 =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 창조의 능력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가 이기신 것처럼 이기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능력의 비결은 이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고 그 능력을 행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에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한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면서 그의 일을 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죄를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칭의를 가능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동시에 성화를 가능하게 한다. 성화의 원칙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 임을 충분히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이 전적으로 인간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깨닫게 된다. 앞의 기사 “칭의”에서 언급했던 사실을 다시 반복하지만, 만일 죄인이 자신을 예수님께 바치고 그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과거의 생애가 그때까지 아무리 죄로 가득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간주해 주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의 성품을 대신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죄 지은 일이 없는 사람처럼 가납된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마음을 변화시켜 주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 속에 거하시고 함께 사시는 것이다. 의롭게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얼마나 풍요하고, 얼마나 완전하고, 얼마나 만족스러운 것인가! 복음은 인간의 교만이나 공로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된 것이다.

물론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허다한 투쟁을 경험하게 하고 또 거기에는 사단을 대적하는 만만찮은 전쟁이 있을 것이다. 또한 강력한 투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거기서 승리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발진(發進)시켜 주시는 힘인 것이다. 이런 이유때문에 바울은 이 복음을 일컬어 “능력있는 복음”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충만한 능력을 주신다. 그는 비단 우리를 죄의 저주로부터 구하시는 능력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와 그 죄의 가책으로부터 격리시켜 보존하시는 능력까지 공급해 주신다.


성화는 사랑으로 얻는다

그러나 성화를 이루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우리 신앙의 동기가 되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면 모든 것이 짐이 되고 고역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자연히 회개하게 되고 그에 따른 칭의와 성화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할 때에는 하지말라고 해도 모든것을 자원해서 행하게 될 것이다. 형제에게 가서 먼저 용서를 빌게 될 것이고, 이웃을 불쌍히 여기게 될 것이며, 인자하고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갈바리의 십자가로 가야 한다. 거기서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무한히 영광스러운 세계로부터 죄로 인하여 손상되고 사망과 저주의 음영으로 어두워진 세계로 내려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이 당신의 사랑의 품과 천사의 존경과 숭배를 떠나서 수치와 능욕과 압제와 증오와 사망을 당하시도록 허락하셨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광야의 예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십자가상의 예수를 바라보라!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의 짐을 몸소 지셨다. 하나님과 일체이신 예수께서 죄 자체가 되셨고,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두려운 간격을 그의 마음 가운데 절실히 느끼셨다. 이것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는 고민의 부르짖음을 그의 입술에서 나오게 한 것이다. 죄의 무거운 짐, 죄의 무서운 흉악성과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됨을 느끼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터지게 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 3:16)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타락하여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자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이러한 속죄를 준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사랑을 타락한 세상에 부어주시는 일에 매개자가 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다. 갈바리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겟세마네의 고민과 갈바리의 죽음으로써 무한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분께서 우리의 구속의 값을 갚으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고 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이런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너희를 심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를 구속하기 위하여 생명을 버린 나를 더욱 사랑하신다. 내가 내 생명을 드려 너희의 죄의 값을 담당하여 너희의 대리자와 보증인이 됨으로 나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무한한 희생이 아니고는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갚으신 대가, 곧 그 아들을 주사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신 하늘 아버지의 희생과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굴복하고 회개하기에 넉넉하다.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은 멸망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보았을 때에 찬탄과 존경의 마음이 충만하여 이 사랑의 위대함과 그윽함을 표현할 적당한 언사를 찾지 못하여 세상을 향하여 “보라”고 부르짖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이러한 사랑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이 사랑은 우리가 매일 깊이 명상할 제목이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비추어서 연구할수록 그의 자비와 온유과 공평과 의로 섞인 사유와 용서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 사랑과 자비를 깨달은 사람만이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화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성화의 길이 너무나 쉽고 즐거운 길이 될 것이다! 독자들이 가는 성화의 길이 즐겁고 행복한 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