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칭의의 조건

칭의의 조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영생을 잃어버리고 멸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구속의 경륜”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 죄의 값인 사망(롬 6:23)을 받게 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어 주심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복음, 곧 복된 소식이다. 우리 모두는 사망의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음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짐을 받았다. 곧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이다(요 1:12).

죄를 용서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칭함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부른다. “칭의”(의롭다는 칭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연구해 보면 그 속에는 놀라운 의미와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으며, 칭의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칭의”하면 신학자들이나 다루고 배우는 용어라고 생각하여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자신의 영생이 달린 구원의 문제는 어느 누구도 대신 연구해 주거나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므로, “칭의”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라도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그 의미에 대하여 깨달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회개하여 칭의를 얻게 되는 과정과 그것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자.


회개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 15).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만나 함께 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며 불의와 함께 거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말을 더 신뢰하여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 불의하게 되므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의 범죄의 결과 때문에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타락된 본성을 타고난(원죄와는 다름) 우리들은 늘 하나님의 법보다는 육신의 법을 따르기가 쉬운 존재가 되었다. 즉, 불법을 행하기가 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의 유일한 정의는 “불법”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하나님의 법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분의 사랑의 성품의 사본이다. 비록 그것이 인간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되도록 도덕적인 십계명으로 쓰여져 있으나, 십계명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사랑”이다. 그것에 나타나 있는 사랑의 마음과 정신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완전한 사랑의 표현인데,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계명에 나오는 정신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 법을 지킬 수가 없다.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새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러면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 모든 것에서부터 돌이켜 하나님과 조화되어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과 어두움의 길을 버리고 선과 빛의 길을 택하여 사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옳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죄인이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을까?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거룩함에 조화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인가? 많은 사람은 오순절 날에 허다한 무리가 죄를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질문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의 첫마디는 “회개하라”(행 2:38)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혀 그는 말하기를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하였다.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며,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다.


십자가 밑으로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알려면 우리는 십자가 밑으로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인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바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되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죄의 값을 치르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을 알게 되므로 회개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신 그리스도를 보고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그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이렇게 사람이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 그는 영광의 주님을 징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배은 망덕과 반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 왔음을 알게 된다. 그는 가장 좋은 친구를 버리고 가장 귀중한 하늘의 선물을 모독해 온 것이다. 계속해서, 그것도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 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 심장을 찔러 온 것이다. 그는 넓고 어둡고 깊은 죄의 심연(深淵)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그 때 그는 그 죄를 슬퍼하며 회개하게 된다.


성령의 이끄심

때때로 죄인들은 그들의 죗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들의 나쁜 습관을 어느 정도 버리고자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이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옳은 일을 하고 싶은 진실한 욕망을 일으켜주고 그들의 생활을 변화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께서 죄인들을 이끄셔서 당신의 십자가를 쳐다보게 하며 그들의 죄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실 때, 그들은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얼마만큼 이해하기를 시작하고 부르짖기를 “죄가 무엇이길래 죄를 범한 자를 구속하기 위해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사랑, 이 모든 고난, 이 모든 굴욕이 요구되었는가?” 하고 외치게 될 것이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죄인이 이 성령의 이끄심과 사랑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께로 끌려가기를 거절할 수도 있으나, 만일 죄인이 거절만 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죄인을 십자가 밑으로 끌고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고난을 받게 한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신다. 이러한 회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승천하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얻는 것이다. 회개 자체에는 우리를 구원하는 공로가 없다. 다만 잃어버린 죄인의 유일한 소망이시며 유일한 구주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 마음을 준비시킬 따름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계명을 바라볼 때에 그가 범한 죄들이 자기 자신에게 밝히 드러나며 양심을 깨우치게 되며 정죄함을 받는다. 그의 유일의 안위와 소망은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데 있다. 그는 과감하게 허락들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 그때에 그의 영혼에게는 위로와 화평이 찾아오게 된다. 그는 “오, 하나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멸망할 수 밖에 없으며 소망이 없는 죄인입니다. 오,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는다. 그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온전히 굴복하게 된다.


자복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회개에는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복이다. 회개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미워하게 되며 그 죄를 버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복을 하게 된다. 우리가 죄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마음 먹자마자 우리의 범죄를 인정하는 순간에 인간의 영혼과 구세주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장벽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것이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조건은 단순하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죄의 사유를 받기 위하여 무슨 괴로운 일 행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은총을 받기 위하여 또는 우리의 죄과를 속하기 위하여 멀고 지리한 순례나 또는 고통스러운 고행(苦行)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은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만일 죄인이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 자복하고 맡기면 예수께서는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그를 깨끗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의 죄를 고집하고 자복하지 않으면 그는 온전히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는 회개하지 않은 어떤 죄도 덮어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 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유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또 형제와의 사이에 잘못을 피차에 자복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친구나 이웃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대는 그 잘못을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도 그대는 하나님께로부터 사유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대가 손해를 입힌 그 형제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그대가 그에게 손해를 입히므로 그의 창조주와 구속자에게 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자복하는 일은 공중 앞에서이든 개인적으로든 충심으로 할 것이며 숨김이 없이 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속 깊은 데서 솟아나오는 자복은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길을 찾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개선이 없는 자복은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다. 반드시 생애에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거리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 일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결과로 될 것이다. 성경에는 자복하는 사람이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6, 17).


변명은 진정한 자복이 아님

우리는 죄를 자복할 때 죄에 대한 핑계를 대면 안된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고 한 과실을 먹은 후에 그들은 수치와 공포의 느낌으로 충만하였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어떻게 저의 죄를 핑계하여서 그 무서운 사망 선고를 면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주께서 그들의 죄에 대하여 물어 보실 때에 아담의 대답은 그 범죄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돌리고 또 일부분은 그 아내에게 돌려 말하기를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하였다. 여인은 그 허물을 뱀에게 돌려 말하기를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하였다. 왜 당신은 뱀을 지으셨습니까? 왜 당신은 그 뱀이 에덴동산에 들어옴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는 질문이 자기 죄를 변명하는 하와의 말 가운데 암시되어 있었고, 그것은 하와가 범죄한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었다. 자기 변명의 정신은 거짓말하는 자의 아비에게서부터 시작되어 모든 아담의 자손들이 나타내었다. 이런 종류의 자복은 성신의 감동을 받아 된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 죄를 속임이나 외식이 없이 자복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불쌍한 세리와 같이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자기 죄를 자복하는 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회개하고 자복하는 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시는 까닭이다. 진정한 회개로 부드러워진 겸손하고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갈바리”에서 지불된 대가를 이해할 것이며, 참으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