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은혜로 구원얻는 다는 의미

은혜로 구원얻는 다는 의미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내 잃었던 귀한 생명 이제야 찾았네...” 은혜에 대한 아름다운 찬송은 늘 우리의 마음을 감동으로 넘치게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은혜”라는 단어만큼 친숙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 은혜에 대해서 나오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 은혜를 받는 방법이 믿음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본적이면서도 많은 경우에 이해가 부족한 한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들을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시다고 찬송을 부른다. 그러면서도 많은 경우에 은혜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란 그냥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덮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만 생각한다. 물론 은혜란 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 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은혜”라는 단어는 그냥 그렇게 단순한 말이 아니다. 거기에는 너무나 놀랍고도 심오한 뜻과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저 봐주시고 덮어주셔서 구원해 주시는 의미 외에 더 놀라운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은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고,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무엇일까?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은혜 = 능력, 힘

앞서 언급했듯이 에베소 2장에는 우리의 구원 문제와 관련된 “은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게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인간의 선한 행실이나 순종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더 순종하며 선한 행실을 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실 은혜란 하나님께서 부족한 사람들을 불쌍히 봐주시는 의미 그 이상의 것이다. 은혜란 능력이며, 힘이다. 은혜도 죄처럼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인 것이다.

에베소서 2:1-7절을 읽으면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은혜”라고 하는 단어의 뜻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지를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지금 읽은 말씀은 폭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에베소서 2장은 “은혜”를 부활의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들을 다시 살리셔서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살도록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켜 주신다. 그리고 5절은, 바로 그것이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과거에 묶여 있었던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시는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끝내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붙잡혀 있었던 과거의 죄의 힘, 그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일도 동시에 행하시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계속적으로 죄에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매일 매일 은혜(힘, 능력)를 항상 공급하여 주신다. 물론 받는 자들이 계속 원할 때에 그러하지만... 다윗은 시편 51:1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은혜로 받는 구원에는 새롭게 태어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포함된다. 그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는 생애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참된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살인자가 사형 선고를 받고 형 집행 날자를 기다리고 있을 때 우리는 그가 법 아래 있다고 말을 한다. 그는 죄책감과 아울러 법의 정죄 아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대통령이 그러한 암담한 입장에 있는 그 죄수를 정상을 참작하고 불쌍히 여겨 용서하고 사면해 줄 때 그는 더 이상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게 된다. 법이 더 이상 그를 정죄하지 못하게 된다.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에 경찰이 막을 수가 없다. 그는 법을 집행하는 최고의 지도자에게서 용서를 받아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 아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다고 이제부터 법을 마음대로 어기고 살아도 좋다는 말인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법을 더 잘 순종할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그가 값없이 받은 그 용서가 너무나 고마워서 이제는 평생동안 법을 존중하며 살 것이라고 오히려 몇 번이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게 될 것이다.

은혜 받은 자의 태도

1800년도 중반에 미국 죠지아 주에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한 부자가 노예 시장에 가서 아주 반항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한 쓸모없는 흑인을 꽤 많은 돈을 주고 샀다. 그 주인의 마차에 실려 오면서 그 노예는 줄곧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일 하지 않을 것이요. 나는 당신들을 증오하오!.” 그런데 그런 말을 계속 듣고 있던 주인이 농장에 도착하자 마차에 묶여 있던 그 노예의 손과 발목에서 사슬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을 비싼 값을 주고 산 이유는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요. 당신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였소. 이제부터 당신은 더 이상 종이 아니요. 당신은 이제 나의 친구요. 이제부터 당신은 자유의 몸이요. 마음대로 하시요.” 이 흑인은 처음에는 그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주인의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되자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내가 당신을 오해하였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처럼 좋은 분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주인님 집에 머물러 있게 해 주십시요. 저는 평생 주인님을 섬기겠습니다. 주인님의 명령을 순종하면서 평생 살겠습니다. 의무적으로가 아니라 주인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평생토록 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은혜 받은 자의 태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로마서 6:1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혜의 힘은 죄가 우리를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하게 해 준다. 은혜로 계명을 폐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를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만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능력을 안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은혜의 의미를 체험하는 사람이라면 기쁨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바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