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핍박의 신학


핍박의 신학

항상 그러했듯이 역사에서 종교를 핍박한 세력은 어떤 독재자의 세력도, 어떤 다른 이상한 세력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의 신조가 다른 소그룹의 종교를 핍박하는, 인간의 유전을 더 중요하게 믿으며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형식적인 다수의 종교 세력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 다수의 우세한 종교가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여 억지로 자기의 신앙을 강요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자행된 핍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교도들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은, 세력이 우세한 그리스도교가 저희와 믿음이 다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지 못하게 해야 했으며, 이런 위험한 정신이 그들 안에 깃들게 하지 말아야 하였다. 옛날, 이교도 사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소수였으므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정한 후 그 당시 그리스도교가 유행이 되고, 또 기독교 세력이 정치의 권력과 결탁하여 우세하게 되며 이교의 정신으로 물들었을 때, 그렇게 종교를 강요하는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덧붙여 말하면, 교회가 세력을 얻고 당대의 인기있는 것이 되어 많은 사람이 개종하게 될 때, 사람이 어떤 종교로 개종하려면 마땅히 필요되는 참된 거듭남과 헌신의 경험을 경하게 여기게 되므로 그 교회 교인들의 신앙심과 헌신이 희석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의 3부 기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무리 개혁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정신과 개혁에 있어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완전하게 따르는 데는 미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종교적인 열성으로 자신들의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였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길이, 자신이 정설이라고 생각하는 ‘교리’를 넣어줄 수 있으며, 그들을 “이단”과 “이설”에서 보호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 개혁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전하는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천주교회처럼 핍박하고 강요하여서라도 믿도록 하려는 정신을 넣어준 한 유명한 “핍박 신학의 이론”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자라고 불리는 그 유명한 ‘어거스틴’이 성립한 이론이었다.

핍박 신학의 원조 어거스틴

기원 후 3세기 경에 살았던 교회 감독 어거스틴(354-430)은 로마 천주교의 교리를 조직화한 사람으로서 천주교에서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까지 대부로서 추앙을 받고 있다. 많은 저자들은 칼빈의 가르침 중 많은 이론들이 어거스틴이 제창한 교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나 칼빈을 향해 “그리스도교 역사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자”였다고 역사가들이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무조건 그들을 찬양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은 아버지가 이교도였기 때문에 그의 유년 시절에 신약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광범위하게 빗나간 이교의 교육을 받았고, 그러므로 그가 제창한 이론들은 이교가 가지고 있는 견해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어, 깊이 들어가 보면 이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오류의 가르침들을 교회에 많이 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어거스틴의 견해를 그대로 따라갔다. 특히 성경 창세기 처음부터 9장까지를 우화적으로 해석하라는 어거스틴의 충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진화론을 믿도록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어거스틴과 칼빈은 다수의 종교가 소수의 종교 그룹을 핍박하는 일을 ‘정당화’시키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현대 신학자들은 이 사람들을 찬양하지만, 종교가 정치의 힘의 도움을 받고, 종교와 정치가 통합할 때, 다시 그것이 소수의 종교 그룹을 무섭게 핍박하는 세력으로 변할 위험성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비극적인 교훈을 잊어버린 채, 정치와 종교의 분리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다수가 가진 신앙과 종교를 국가의 힘을 빌어 강요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본다.

핍박 신학의 이론

그러면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핍박 신학의 이론”에 대하여 알아보자. 히포에 있는 교회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죽은 지 17년 후에 태어났는데, 그는 콘스탄틴 황제의 ‘종교와 국가의 통합의 개념’과 ‘도나티스트’를 강하게 반대하는 정신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도나티스트’들은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개념대로 ‘교회의 몸은 그리스도께 그들의 삶을 온전히 헌신한 참된 교인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교회의 몸은 국가이고, 교회와 국가는 분리 할 수 없는 한 몸이며, 그렇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모든 국민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아주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어거스틴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이 개념은, ‘교회의 몸’인 ‘국가’가 선택한 종교를 믿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도나티스트’들의 생명을 위협하였으며, 이것은 로마 제국의 통용되고 있는 천구교의 신조와 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규정하여 온갖 핍박을 다 가하였다. 그런데 그가 콘스탄틴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그 둘 모두가 이방 종교였던 “마니교(Manichaeism)”의 가르침들과 개념들-종교와 국가를 하나로 보는 개념 등-속에서 자라났고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천주교 역사에 있어서 어거스틴 만큼 그 교회의 사상과 철학에 영향을 미친 교부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지 못한 어거스틴은 시편 72:11에 나오는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는 성경절을 잘못 인용하여 말하기를-이제 교회는 지배하고 통제하는 힘이 더 막대해졌으므로 모든 왕이 그 앞에 부복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국가가 제정한 종교에 굴복하게 하여야 하며, 강요하고 강권하여서라도 이 좋은 종교를 가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유명한 “Compell them to come in” Theory- “강요하여 들어오게 함”의 이론이다.

또한 눅 14:23에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성경절을 잘못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믿도록 강권하라고 하셨다’고 하며, 종교를 억지로라도 믿게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레오날도 벌두인의 “개혁자들과 그의 양자들” 65, 66에서 참조)

초기 핍박 당시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화형시키는 일이 많지 않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불에 태워 죽이는 일이 널리 퍼져서,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믿는 셀 수 없이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귀중한 목숨이 화형대에서 불살라졌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박해자들은 성경 요한복음 15장 6절의 말씀, 곧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는 구절 중에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을 “만일 사람이 로마 천주교회를 거절하면”으로 해석하여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불에 태우는 일을 합리화하였다.

한번 그리스도 교회에 이교의 정신이 들어오자, 교회는 자기의 이론과 신조를 강요하려고 사용하는 “무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약과 신약에서 구실이 될 만한 성경절들을 자꾸 찾아 내었다.

그들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용했던 창과 검,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께 얘기한 눅 22:38에 있는 ‘두 검’에 대한 이야기-베드로가 예수님께 두 검이 있다고 하자, 예수께서 ‘족하다’고 하신 장면의 이야기-를 부적당하게 인용하여 말하기를, 한 검은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이고 또 다른 한 검은 국가의 군인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며 그들이 하는 핍박을 정당화시켰다. 그리고 이 개념은 12세기에 와서 더욱 강하게 강조되었다. (레오날도 벌두인의 저서 “개혁자와 그의 양자들” p42 에서 참조)

그리고 어거스틴의 ‘강권하는 이론’은 이렇게 핍박하는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일에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렇게도 위대하다고 숭배받는 한 성인의 잘못된 개념과 잘못된 성경 해석이 그렇게도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게 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초창기 그리스도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함으로 힘을 얻어, 이교가 정치의 힘을 빌어 압박해오는 모든 박해와 반대를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와 연합하여 정부의 도움과 힘을 요청하고, 하나님을 부인한 채, 교회의 참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 이 땅에 천 년이 넘는 그 긴 종교 암흑 시대가 도래하도록 이끌어 갔던 것이다.

장래의 핍박을 견딜 사람들

성경은, 이 땅에 멀지 않아 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믿는 신실한 교인들에게 중세기 때 있었던 것 같은 핍박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핍박의 행위를 사회와 종교의 정당성을 들어 합리화시킬 것이며, 또 그것은 성경의 이론에 입각한 행동이라고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래 전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18~20).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 16:2)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진정으로 충성하는 자인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과정이 될 마지막 핍박을 견딜 자들은, 그리고 그 어려운 핍박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진리를 고수할 사람들은, 지금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하심만을 바라며 혼자 묵묵히 진리를 고수하며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주위의 모든 사람의 신앙이 식어갈 때 그 차가움에서 열을 취하고, 모든 사람의 신앙이 형식적이고 냉랭해질 때 진실되고 열렬한 신자가 되어, 주위의 영적인 기근에 아랑곳없이 늘 하나님과 산 연결을 맺어 활력있는 신앙 생애를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제 앞으로 시련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생애의 법칙으로 삼은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여름에는 상록수와 다른 나무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겨울 바람이 불어오면 상록수는 변함없이 남아 있지만 다른 나무들은 잎이 떨어져 그 가지가 벌거숭이가 된다. 그것처럼 지금은 마음이 거짓된 신앙 고백자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구별이 분명히 지어질 때가 절박해 오고 있다.

만일 반대와 핍박이 우리의 신앙을 향해 일어난다면, 완고와 억압이 다시 기세를 떨친다면, 박해의 불길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러면 분명히 반신 반의의 위선적인 신자들은 흔들리고 믿음을 버릴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반석과 같이 굳게 설 것이며, 그들의 믿음과 소망은 번영의 때보다 더욱 강하고 더욱 밝아질 것이다.

당신은 다가오는 핍박을 위해 믿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