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핍박의 역사


핍박의 역사

 선과 악의 대쟁투가 걸려있는 이 지구의 세상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과 사단이 인간 역사를 다루는 방법의 현저한 차이를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자유 의지를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셔서, 인간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따르도록 만드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모든 일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시며 무슨 일이든지 우리를 억지로 강요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비록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섬기는 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분은 결코 인간의 양심을 강요하여 억지로 하나님을 믿도록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사단의 방법은 이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항상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고 강요하고 위협하여 어떤 것이든지 강제로 받아들이게 한다.

핍박의 기원

    핍박은 항상 죄의 역사와 더불어 병행해 왔다. 죄가 들어와 선과 악의 대쟁투가 시작된 이래 이 지구에는 항상 끊이지 않는 전쟁이 있어 왔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의와 불의 사이에, 사랑과 증오 사이에, 그리고 거짓과 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마찰이었다.
제일 처음 나타난 핍박의 정신은 가인과 아벨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통해 나타났다. 가인은 자기의 동생 아벨이 의로웠음으로 그를 미워하여 죽였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적인 원수들의 연합 세력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도 그와 같다. 의와 죄, 참과 거짓 사이에는 억제할 수 없는 갈등이 있다. 박해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 원칙 곧 그 아래 깔려 있는 정신은 아벨 시대 이후로 지금껏 주님의 택한 자들을 살해해 온 바로 그것이다.

핍박의 시초

    기원 후 64년 경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 성령의 능력하에 온 천하에 전파되었다고 자신있게 공포할 수 있었을 만큼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교는 성공적으로 포교되었다. 그러나 AD 70년 로마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 하나님을 믿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더불어 이방인들의 미움의 표적이 되었다.
로마의 디시우스(Decius) 황제는 한 법령을 발표하여 누구든지 이방 신이었던 로마의 신에게 경배하고 희생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고, 이 법령에 불복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당하였다. 레오날드 벌두인 (Leonard Verduin)은 “개혁자들과 그의 양자들”이라는 저서에서, 그 때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방 종교로 개종시키려는 세속적인 세력으로 인한 강렬한 반대에 처음으로 봉착했고, 그때가 그리스도교에 세속주의가 들어와 발전하기 시작한 시점이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기원 후 303년에는 십여년간에 걸쳐로마의 이교도인 디오클레시안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무서운 핍박이 계속되었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고수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 여파로 그 황제가 퇴위한 몇 년 뒤에까지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자행된 핍박에 의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고문과 형벌로 인하여 불구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생겼다. 그런 모든 핍박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수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불가능하게 보였는지!

또 다른 핍박의 양상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에 즉위한 뒤에는 새로운 양상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매우 영리하고 정략적인 정치가였으므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들을 화합시켜 그의 왕국과 정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일환으로 삼으려고 AD 312 년에 한 법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황제 자신이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교에 입적한 후, 누구든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일요일을 예배일로 삼으라는 강제령이었다.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상의 안식일인 일곱째 날 토요일을 예배일로 지키고 있었고, 이교인들은 일요일을 태양신을 섬기는 날로 삼아 그들의 신을 경배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반면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던 예배일인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이방인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강압에 의하여 그리스도교에 입적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하였을 뿐만 아니라, 태양신을 섬기던 일요일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명제를 세워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 법령이 얼마나 신속한 배도로 그리스도교를 인도하며, 그 무서운 종교 암흑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교회 성직자 지도자들에 의하여 반대자들을 참혹하게 핍박하는 무자비한 학정으로 변하게 하는 원천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 법령이 선포되었을 때 그것은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그동안 계속되던 핍박에서 구원하기 위한 얼마나 놀라운 사건으로 보였던가!

    “그런데 이제는 양상이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던 모든 불이익이 이교도인들에게 이르러 왔는데, 그것은 어떤 이교도인들이든지 만일 집안에서라도 우상에게 아주 적은 제물일지라도 바치고 우상을 숭배하면 굉장한 벌을 받았고, 그들의 이교신을 섬기는 일들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아직 그리스도교의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침례 공부반에 참석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침례 공부 후에는 반드시 침례를 받도록 하였고 이에 불복하거나 아니면 침례를 받은 후에 다시 예전 이교도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심한 형벌을 받았다” (레오날도 벌두인 저 “개혁자들과 그의 양자들” p32 참조).

    세상 역사에서 이방종교가 쇠태하고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강해질 때, 세력이 왕성해지고 있는 크리스챤 종교가 이교의 세속적인 사회의 전례를 모방하여, 그리스도교 안에 세속주의를 발전시키는 형식적인 종교가 되어, 하나님의 참 교회를 핍박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

반대하는 무리가 생겨남

    그런데 교회가 세력을 얻어 커지고, 영적인 상태가 세속화될 뿐 아니라 종교를 강요하는 이교의 정신을 나타내자, 이런 세속적인 양상을 따라가기를 거부하는 한 크리스챤의 무리가 생겨났는데, 그들은 “도나티스트”라고 불리는 일단의 그리스도인 그룹이었다.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가 비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강제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일에 반대하였다. 그들과 세속주의 사이에 있던 차이는 그들이 믿는 교리나 신학 이론에 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종교가 국가와 하나가 되어 종교를 강요하도록 지배하는 세력에 대한 반기를 든 것에 있었다.
    “도나티스트”들은 그리스도교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종교가 국가의 힘과 결탁하여 자기의 종교를 강요하는 사회 제도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방법이라기 보다는 사단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이교의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교의 세속주의”에 의해서 초래되는 강요와 핍박에 반대하여 일어났으며, 그들은 지금의 북 아프리카 지역에 많이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교회가, 그들의 마음이 참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되었다기 보다는 “즉흥적인 개종” , 곧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들 앞에 이르러 올 생명의 위협과 위험과 핍박을 피하려고 막무가내로 그리스도인이된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 “도나티스트”들은 세상의 다수를 차지하는 가짜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다른, 적은 수의 참된 남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일반적인 정신에 거부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전 형제들에 의하여 무서운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언급하면, 이 핍박은 그들의 신앙 신조와 믿음에 대한 핍박이었다기 보다는, 종교가 국가와 통합하여,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종교의 특권을 빼앗고, 황제의 강제 칙령을 강요하는 세력이 된 것에 대하여 반대하기 때문에 오는 핍박이었다.

광야 교인들의 생성

    이 핍박은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광야 교회”로 내몰았다. 항상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와 종교의 통합”을 반대하던 “도나티스트”들이 걸은 길을 따라갔다. 이들이 4세기 경에 생긴, 종교 암흑시대 동안 성경에 나타나 있는 참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광야”로 쫓겨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한 “왈덴스인”들이 되었다. 그 외에도 “알비젠스”나 “휴구노” 같은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 무리들이 몇년 뒤에 생겨났다.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는 로마 천주교의 교황이 각 나라의 정권과 결합하여 세계의 주권을 장악하고, 그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천주교와 그들이 지어낸 교리를 믿지 않고 성경을 그대로 믿으려는 무리들을 핍박하였고, 13세기 경에는 그 무서운 종교 재판소를 세워 그 곳에서 세속적인 종교와 교인들에 의하여, 4, 5세기 경의 도나티스트들처럼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고 종교의 자유를 고수하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무섭고 잔인하게 핍박하였으며,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참혹한 고문과 죽음을 당하였다.
    기대되었던 대로 “교회의 세속주의자” 들은 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이기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의 권위를 강요하기 위하여 국가와 정치의 “힘”과 “무력” 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왈덴스인들이나 알비젠 교도들이나 휴구노 같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와 정치의 통합”을 반대하고 믿지 않았으므로, 국가의 군인들의 무자비한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 만한 아무런 무기나 무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개혁자의 출현과 과거의 답습
   
앞서 나타났던 ‘도나티스트’들이 가졌던 정신, 즉 죽음도 불사하고 항거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순교자들이 가졌던 참된 신앙의 정신은 16세기에 나타난 개혁자들에 의해 검증되었다. 쯔윙글리나 루터 같은 훌륭한 개혁자들이 이들이 닦아놓은 터 위에 굳게 서서 종교 개혁을 부르짖게 되었다.
    그런데 종교 개혁운동이 궤도에 올랐을 때 그들은 부패한 교회가 행했던 과거의 실수를 그대로 모방하는 일을 답습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종교 개혁운동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정부의 권력, 즉 세속적인 지도자들의 힘에 보호를 신청한 것이었다. 이렇게 종교가 국가의 방어와 보호를 구한 것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며, 결국, 칼빈을 포함한 그 위대한 개혁자들도 교황의 발자취를 따라 자기들이 주장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런데 루터나 쯔윙글리나 칼빈 같은 개혁자들이 자기들의 이론 -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유아 세례나 예정설 등 - 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들은 “아나벱티스트 (Anabaptist)” 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침례의 의미와 종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대로 스스로 원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며, 교회는 신약 시대의 교회처럼 운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핍박함

    놀랍게도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개혁 운동을, 타락한 로마 천주교회의 발자취를 따라 전개함으로, 쯔윙글리 같은 개혁자는 자기가 주장하는 ‘유아세례 이론’에 동조하지 않는 수 많은 아나벱티스트들을 자신의 교회 앞 강물에 던져 넣어 죽였다. 또 루터는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물을 뿌려 세례를 주는 ‘유아세례’를 굳게 신봉했고 자기의 믿는 신조를 관철하기 위하여 세상 지도자들의 세력에 결탁함으로 결국에는 이런 정신과 믿는 이론 때문에 독일이 나뉘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종교가 정치 세력이나 세속적인 권력의 힘을 빌자,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만약 그 주(State) 를 다스리는 정치가가 로마 캐톨릭을 믿으면, 그 주는 “천주교 주 (Roman Catholic State)” 가 되어 개신교도 (Lutheran Protestant) 들을 핍박하였고, 만일 그 주(State)의 지도자가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면 그 주는 “개신교 주 (Protestant State)” 가 되어 천주교인들을 핍박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에 맞는 주 (State) 를 찾아 거주지를 옮겨야 했고, 이 종교도 저 종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도 보호를 받지 못하였으며, 아나벱티스트 같이 성경 그대로 믿으려는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 아메리카로 이주하게 되었다.
    또 칼빈은 자기가 제창한 이론에 의의를 제기하고 토론하기 원하여 찾아온 스페인의 과학자 써비터스 (Servitus) 를 자신의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형시켰는데, 그것도 자신의 신조를 믿지않는 “이단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다며 푸르고 젖은 장작에 천천히 태워 죽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캘빈의 전혀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행동을, 루터의 동조자들과 심지어 부드러운 개혁자로 불리우는 멜랑톤까지 잘했다고 후원하였으니, 지나친 종교의 열성이 오히려 또 다른 귀한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잔인한 일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종교사는, 많은 경우에 참된 그리스도의 정신을 잊은 채,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과 진리를 버리고, 자기와 사상과 신조가 다른 종교와 성도들을 핍박한 역사들로 채워져 있다.